며칠 전, 멕시코의 한 방송사가 발표한 신작 예능 라인업을 보다 낯선 익숙함에 눈이 멈췄다. 한적한 해외 소도시에 작은 식당을 차리고 현지 손님에게 한 끼를 내주는 포맷. 이름도 배우도 전혀 다른데, 화면의 짜임새는 어디서 많이 본 그것이었다. 우리가 몇 해 전 즐겨 보던 프로그램의 '골격'이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 예능은 완성된 영상만 파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설계도' 자체가 상품이 되어 세계로 나간다. 이 설계도를 업계에서는 포맷(format) 이라 부른다. 오늘은 웃음과 감동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팔려나가는지, 그 구조를 차분히 들여다본다.
포맷을 판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흔히 아는 콘텐츠 수출은 완성본을 파는 방식이다. 드라마 한 편을 자막이나 더빙만 입혀 그대로 내보내는 것. 반면 포맷 수출은 완성된 영상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규칙과 구성, 진행 방식을 담은 '제작 매뉴얼' 을 파는 일이다.
여기에는 회차별 흐름, 세트 구성, 게임의 규칙, 편집의 리듬, 심지어 출연자를 배치하는 방식까지 세밀하게 적힌다. 이걸 산 나라는 자기 나라 배우와 언어로, 자기 시청자 정서에 맞게 프로그램을 새로 찍는다. 원작 제작사는 판권료(라이선스)와 함께, 촬영을 돕는 컨설팅 비용까지 받는 경우가 많다.
완성품을 파는 것이 '생선'이라면, 포맷을 파는 것은 '낚시법'을 파는 일에 가깝다.
왜 이 방식이 각광받을까.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이다. 아무리 잘 만든 예능도 남의 나라 얼굴과 낯선 유머 코드로는 현지에서 크게 터지기 어렵다. 하지만 '재미의 뼈대'만 가져와 현지 옷을 입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청자는 자기 나라 스타가 나오는 친숙한 프로그램을 즐기고, 원작사는 앉아서 로열티를 받는 구조가 성립한다.
세계가 산 대표 설계도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음악 추리 예능이다. 이 포맷은 전 세계 수십 개국에 팔려 각국이 자체 버전을 제작해 왔고, 미국 지상파에서는 방영 당시 오랜만에 손꼽히는 예능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목소리만으로 정체를 추리하는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재미가, 언어가 달라도 그대로 통했던 셈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가려내는 또 다른 음악 추리 예능은 유럽 여러 나라에 포맷이 팔렸다. 스타와 일반인 모창자를 뒤섞어 놓고 진짜를 찾는 구성은, 무대 위 긴장감을 어느 문화권에서든 만들어냈다.
이 밖에도 여행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관찰 예능, 멤버들이 미션을 수행하며 좌충우돌하는 게임 버라이어티 등 다양한 갈래가 해외로 나갔다. 공통점이 있다면, 화려한 무대 장치보다 '사람과 규칙이 만들어내는 상황' 에 재미의 핵심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세트가 아니라 구조가 팔린다.
숫자로 보는 최근 흐름 (작성 시점 기준)
시장의 무게중심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최근 자료를 보면 동남아시아 지역이 차지하는 한국 예능 포맷 수출 비중은 2024년 약 31%에서 2025년 약 38%로 눈에 띄게 늘었다. 한류 콘텐츠에 이미 익숙한 시청층이 두껍게 형성된 지역이라, 포맷 현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포맷 한 편의 몸값도 올랐다. 상위권 인기 예능 포맷의 회당 라이선스 단가는 2024년 평균 4만 달러 안팎에서 2025년 6만 5천 달러 수준으로 상승했다는 집계가 있다. 완성본 판매보다 마진이 크고, 한 번 팔면 시즌이 이어지는 동안 꾸준히 수익이 발생한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힌다.
2026년 들어서는 시장 지도가 더 넓어졌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중남미와 중동 이 새 무대로 떠올랐다. 앞서 언급한 멕시코 방송사의 식당 예능 현지판 제작이 대표적이고, 중동의 대형 미디어 그룹이 여행·모험 버라이어티 형식의 도입을 논의 중이라는 소식도 전해진다. 다만 이런 계약과 수치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정확한 최신 현황은 공식 발표를 확인하는 편이 좋다.
왜 하필 한국 포맷일까
여러 이유가 겹친다. 첫째, 한국 예능은 오랜 경쟁 속에서 '기획의 밀도'를 키워 왔다. 좁은 시장에서 수많은 프로그램이 매주 부딪히다 보니, 짧은 시간에 시청자를 붙잡는 구성 감각이 예리하게 다듬어졌다.
둘째, 정서의 보편성이다. 가면 뒤의 사람을 궁금해하는 마음, 낯선 곳에서 서툴게 요리하는 이를 응원하는 마음, 규칙 안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한 상황에 웃는 마음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포맷은 이 보편적 감정을 건드리는 장치 를 잘 설계해 왔다.
셋째, 산업적 뒷받침이다. 포맷을 표준화된 매뉴얼로 정리하고, 해외 제작진을 현장에서 돕는 컨설팅 역량이 축적되면서, '팔고 끝'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수출이 가능해졌다. 이 신뢰가 다음 계약을 부른다.
마무리하며
포맷 수출은 한 편의 히트작이 반짝 팔리는 일과는 결이 다르다. 재미를 만드는 방법론 자체가 인정받는 일이고, 그래서 더디지만 오래 간다. 오늘 우리가 무심코 웃으며 본 예능 한 편이, 몇 해 뒤 낯선 언어와 얼굴로 지구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날지 모른다.
다음에 즐겨 보는 예능이 있다면, 화면 너머의 '설계도'를 한 번 상상해 보시길. 저 구성은 왜 재미있을까, 규칙을 바꾸면 어떻게 달라질까. 그렇게 한 겹 더 들여다보면, 익숙한 프로그램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재미에는 국경이 있어도, 재미를 빚는 방식엔 국경이 없다.


